중용1장 천명지위성
중용1장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한학이나 중국학,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지혜에 관심을 갖고 온고이지신하기 위하여
중용 제1장을 수십회 반복하여 외우고 쓰고 사유하여 여기에 올린다. 특히 성(性), 도(道)
교(敎), 신독(愼獨), 중(中)과 화(和)를 이해하면, 인간 뿐만아니라, 천지 만물에 적용하는
창조(자)의 입장에서 통찰해 볼 수 있다. 이 성(性)을 플라톤의 이데아 이원론적 가치관과
비교하면, 즉 현재 오감을 가진 우리 몸을 현상으로 보고 결국 유기체 즉 탄화수소 원소로
돌아감으로 그 원소와 영혼을 본체 즉 이상적이면서도 실제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적 본체를 중용의 성(性)과, 신(GOD)을 동양의 천지인(天地人)과 양립하는
것이 결국 지혜의 완성이 아닐까 생각된다.(5월20일)
하늘의 명을 이르러 본성(本性)이라 함에서 이 성(性)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의 본성이 100% 발현한다고 가정하면, 그 100% 발현을 위하여 도(道)를 행하고 배우고
성(誠)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100% 발현은 이상일 뿐이고 아쉽게도 우리 대부분은
본성(本性)의 겨우 1~3%정도 실현하다가 삶을 마치는 것은 아닐까 이 중용을 읽으면서 문뜩
스치는 생각이다.
창조 또는 창조자는 항상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벅찬 꿈을 꾼다. 오늘날 우리는 이 중용을
꼭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 하면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 깊숙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주로 향하고 인공지능 로봇이 만들어 지고 생명을 복제 하고 더 지나, 인류도 만들어 내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과연 이 중용의 가치는 존재 할까? 지나간 옛 유물의 하나일까? 아니면,
공자(孔子), 자사자(子思子)께서 가르친 본성(本性)과 그 100% 발현을 위한 성(誠)의 위대한
실천일까? (12월19일)
하늘의 명(天命)을 이르러 성(性)이라 하고 그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그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도(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떨어진다면 도(道)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군자(君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 은밀한 것이 크게 드러나고 작은 것이 더 크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그 홀로 있음에 조심하고 삼간다(愼獨).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현(顯)하여 시중(時中)하면
화(和)라 한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에 대본(大本)이고 화(和)라는 것은 천하에 도(道)가
가득한 것이다.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天地)가 자리 잡고 온갖 만물(萬物)이 자라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사유해 보면, 여기서 성(性)이란 무엇인가? 모든 생명의 근원, 마치 씨알의 열정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씨알의 열정이 그것을 발아 시킬 밭, 즉 터전이 필요하고 싹을 띄우고 줄기를 만들고 성장하고 꽃 피우고
열매 맺는것까지 물론 그 씨알은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고 성장하고 발현되는 원천적 그리고 주관적 본연의
감성(感性) 즉 본성을 갖는다. 그 본성이 발현되기前 순수한 그 자체를 중(中)이라 하고 발현되어 시중하여
만연한 상태를 화(和)라 한다면, 즉 중(中)과 화(和)가 지극한 상태는 이 천지에 가득하여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를 갖는다. 사람의 본성이 100% 발휘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라 사유되지만, 지극히 이상적인 것이고
실제로 우리는 본성의 1 ~ 3% 정도라도 발현할 지 모르겠다.
또한 사람은 은밀하고 사소한 작은 것까지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완벽히 다루고 만들어야 하며 그것이 또한
성(誠)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인간 본성 지성 감성 등 정(情)을 완벽하게 행하는 것을 가르켜 성(誠)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정성(精誠)이란 말도 성실(誠實)이란 말도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성(誠)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경(敬)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아니 영원히
우리는 성(誠)과 경(敬)을 실천해야 된다. 그것이 우리의 나아갈 바이므로 이 중용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