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솔올마을 회상기 


  

얼마 전 교동택지의 명칭이 솔올마을로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강릉시가 교동택지에 붙일 여러 개의 이름을 놓고

고심하다가 최종적으로  솔올마을로 결정했다고 한다. 교동택지에 솔올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말을 들으며

교통택지가 그렇게 구수하고 유서 깊은 이름을 갖게 된 것을 강릉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뻐하며 축하하고 싶다. 

교동택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물론이고 강릉에 오래 살아온 시민들 중에도 원래 솔올마을이 어디였고 마을모습은

어떠했으며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인정과 삶은 어떠했는지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비록 지나간

날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솔올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서 솔올의 이야기가 곧 우리

강릉역사의 중요한 일부라는 생각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솔올마을의 자취를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우리 강릉은 오랜 전통과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답게 유난히 토속적인 지명을 많이 가진 고장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심과 문화가 바뀌어 그 옛날 친숙하게 부르고 들었던 독특하고 구수한 이름들이 하나씩 잊혀져 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 삶의 뿌리가 허물어지는 것 같아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가난하고 힘든 삶의 과거였지만 훈훈한

공동체 의식이 있었던 과거를 소중하게 여길 때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향토사학자도 향토지리학자도 아니다. 그래서 솔올이란 지명의 어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언제부터 그 이름이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솔올마을이 수백 년, 아니 어쩌면 천년의 세월도 넘어 우리의 선조들의

희로애락을 담아왔던 삶의 터전이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중할 따름이다.    

솔올마을은 행정구역상 지금의 교1동의 한 부분인데, 당시의 정확한 위치를 사방의 경계로 말하자면, 동쪽으로는

제일고(당시는 강릉상고)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바로 붙어있던 마을인 갈매골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지금의

교동택지 남쪽 산 너머 골짜기로부터 시작되며, 서쪽으로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교동택지로 넘어가는 도로

우측지역이며, 남쪽으로는 지금의 교동4거리에서 고속터미널로 올라가는 큰 길의 오른쪽을 아울렀던 마을이다.  

7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 지역은 대부분 산과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멀리 대관령에서 뻗어 내려왔으리라고

생각되는 야산의 기슭을 따라 꽤 넓어 보이는 논배미들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솔올마을의 북쪽마을은 원대재라고 불렸고, 원대재의 동쪽은 이랠, 뒤쪽은 모솔이었다. 모솔은 서쪽으로 개좃바위로

유명한 우추리(유촌리)와 경계를 이루었고, 동쪽에는 방축거리가 있었다. 방축거리에서 북쪽으로 들어간 지역이

핸다리이고, 핸다리의 동쪽이 한밭이다.  

솔올의 동쪽은 갈매골, 남쪽 재 너머가 골말이다. 솔올의 서쪽지역 경계 너머에는 당시 누구나 가기를 꺼렸던

공동묘지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자리에 학교와 아파트와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이 공동묘지의 아래

기슭에는 상여집이 있었고, 질퍽한 논을 가로지른 건너편에는 도살장이 있었다. 그러니까 현재 교동택지는

옛 지명으로 말해서 이랠과 원대재, 그리고 모솔의 앞쪽 논과 산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지역이다. 

솔올마을의 북쪽 골짜기는 동녘골이라 불렸는데 나는 바로 이 동녘골 제일 북쪽의 외딴집, 그래서 아이나 어른이나

날이 저물면 호랑이가 나온다고 지나기를 무서워했던 동녘골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솔올마을은 중앙에 제법 널따랗게

펼쳐진 논배미들을 중앙에 두고 양쪽 산자락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골짜기 북쪽 산 밑에 있는 개똥이집을

시작으로 동녘골집, 배달이집, 석집이집(흔히 똥집이집이라고도 불렀음), 형만이집, 안에집(무서운 노인 내외와

큰 개가 있던 집), 대밭집, 말진아집(말진아는 여자 아이 이름임), 원주집, 우체국집, 작은얭(양양)집, 진화집, 새끼꼬는집,

섬둘집, 이발소집, 기계방아집, 우유집, 장구쟁이집, 한문선생집이 좌측으로 죽 늘어서 있었고, 논 서편으로는 병원집,

순애집, 중방댁, 도랑가집, 작은재집, 두부집, 목수집, 남자 상길이집, 앞댁, 여자 상길이집, 영림서집, 사진쟁이집,

감나무집이 이어져 있었으며, 솔올마을의 서쪽 산등성이 너머에는 큰재집, 함석집(은행집이라고도 불렸음), 유기집,

신영극장집, 만기집, 큰얭(양양)집, 숩실집이 있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잣집은 형제지간인 큰재집과 작은재집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저 일상적으로 부르던 집 이름이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솔올마을 사람들의 삶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너무나 그립고 정다운 이름이다.      

솔올의 서쪽 마을 산기숡에는 자그마한 개울이 흘렀다. 산은 높지 않았지만 숲이 깊고 샘이 좋아 물이 달았고, 산자락을

돌아내리는 개울엔 언제나 맑은 물이 흘렀다. 개울물이 산자락의 좁은 도랑을 지나 넓게 터지는 곳에는 동네 아낙네들의

빨래터가 있었다. 이 빨래터에서 솔올마을의 아낙네들은 박달나무 빨래 방방이를 두드리며 삶의 애환을 나눴다.    

산이 갈라진 틈새에는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여울이 솟아올랐고 아이들은 그 여울 아래 도랑에서 검정고무신이나

낡은 채바퀴로 미꾸라지와 용곡지(송사리)를 잡았다. 흙과 거름과  여울물로 살찐 미꾸라지와 용곡지는 솔올 아이들의

고마운 단백질 공급처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바닥은 솔올마을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마른 논바닥에서 짚으로 만든 공을 찼다.

눈 내린 오리나무 위에 참새 떼가 까맣게 내려 안고 날아오르는 겨울 아이들은 얼음이 언 논에서 굵은 철사 줄을 바닥에

댄 안질뱅이(썰매)를 탔다. 얼음판에서 놀다 지치면 아이들은 논둑에 불을 놓아 감자와 말린 양미리를 구워먹기도 하였다.

별 얼고 달 우는 정월 대보름날밤 아이들은 산등성이에 올라 소까지가 채워진 깡통에 불을 붙여 동해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맞으며 망월이를 돌렸다. 

무더운 여름날 김매기를 마친 솔올 사람들은 한데 모여 차린 음식을 나눠 먹으며 농악을 했다. 솔올마을 사람들은

단오 때도 농악을 했는데 하늘 높이 뽑아 올리는 대평소 가락에 장단을 맞춰 부르던 동네 어른들의 아라리오 소리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흙과 함께 살아가는 삶만큼이나 아름답고 애절했다.     

그 시절 우리의 선조들이 모두 그랬듯이 솔올사람들도 죽는 날까지 똥장군을 등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고된 농사일에 지치고 속아 사는 삶에 멍들어도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던져 헌신하던 사람들이었다.

깍두기 안주에 쓴 소주를 들이키며 꺾어 부르던 솔올 어른들의 그 애절하고 구성졌던 아리리오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산수가 좋고 마을 사람들이 착하게 열심히 살았던 탓인지 솔올마을은 좋은 인재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솔올마을의 후손들은 지금 사회 각 분야에서 지역과 나라의 중요한 일을 책임지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성곡회라는 토박이 모임을 통해 그들의 뿌리를 확인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순박한 인심, 끈끈한 이웃사랑이

넘치던 곳, 미래를 향해 소박하고 정직한 꿈을 키우던 곳이 바로 강릉북촌 솔올마을이었다

 

                                     강릉 솔올마을 회상기 [영동저널 창간호 2005년 2월 28일]  김 창남 氏

 

 

나는 이 글쓴이 보다는 한참 아래같고, 원대재에서 태어났지만, 학창시절에 이미 벌써 옛마을이

시들어 갔고, 옛 어르신들은 돌아가시고, 새로이 솔올택지가 조성되고, 고향을 떠난지 십 수년을

넘기다 보니, 이제는 잘려나간 산등강과 신 시가지만 보고 있습니다.

 

이 솔올마을 회상기와 더불어,  뇌리 속 어린 시절을 안데르센 동화집 한 폭의 그림처럼........

마치 우물가 모과잎이 한잎두잎 떨어지는 듯, 아직도 굴뚝에 모락모락 연기 피어나는 듯........

눈을 뜨니 내 마음을 적시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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