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의 친구

 

 

물론 진부한 얘기이다. 옛날 조선시대 얘기일 수도… 지금에는 다른 해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위 내용에도

아들의 친구들은 법대로 논리적으로 대응했지만,  아버지의 친구는 오랜 우정과 믿음에서 나온 진정한 행동을 보여줬다.

해외배낭여행을 가면,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내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는 믿음과 정으로 가장 어려울 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다.

 

 

허구한 날 친구들과 흥청망청 살아가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렇게도 친구가 좋으냐며 네 살 궁리를 하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친구가 그리 좋으면 시험 한 번 해보자고 제안했고 아들도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런 의리의 친구들이니까요 얼마든지 시험 해봐요라고 했다.

 

결국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자루에 담아 아들이 먼저 짊어지고 친구에게 찾아가

“내가 어쩌다가 사람을 죽였으니…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사정해 보아라… 너를 받아 드리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버지는 너에게 관여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먼저 아들이 돼지 자루를 짊어지고 제일 친한 친구를 찾아가니

“어쩌다 그랬나! 그럼 너는 살인자로 조사반들이 찾을텐데…

어서 가서 자수하게, 미안하네.” 두번째도 같은 말을 했고 세번째, 네번째도…

울면서까지 사정을 해도 거절당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돼지 자루를 등에 매고 가장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친구집을 찾아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집을 찾아가,

“여보게 내가 어쩌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네. 잠시 몸을 피해 있어야겠는데 자네집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면 하네.” 하자,

 

“어쩌다 그랬나! 어서 들어오게, 밤이 깊었으니 어서 자고 내일 얘기하세, 시체는 광에다

갖다 놓고 올 테니, 어서 잠이나 자게 얼마나 놀랬는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사람을 죽였는데, 사실이 밝혀지고 벌을 받아야됨이 맞다.

그런데 또한 진정한 우정이란 그러한 친구도 이해하고 보듬는 것이다. 범인을 은닉하고

시체를 유기하는 일을 도와줬고 이 친구도 죄명이 늘어나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진정한 우정은

이러한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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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용력과 용서 (2011년 11월 12일)

 

 

 

 

황조롱이

 

 

 어떤 정치인은 “DJ 정권 출범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맡고 있었는데, DJ의 대북정책과 맞지 않는 인물이

통일부 장관에 임명돼 비판성명을 발표했었다” 면서 “나중에 DJ가 따로 불러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설득해 장관을 맡김으로써 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나의 대북정책을 더 잘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고 인사배경을 설명해 주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지혜를 배웠다” 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몽골 칭기즈칸, 테무친의 일화는 또한 많은 교훈을 준다. 물론 당시 몽골의 상황을 지금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오늘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배워야 할 점은 배워야 된다. 선택하여 적용하면 他山之石이 된다.

'테무친은 이십 세 때, 이웃 부족 멜키트족의 공격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으나, 아내 부르테를 빼앗기고

말았다. 부족을 재건하고 케레이트 왕 토그릴 그리고 친구이자 경쟁자인 자모카의 도움으로 다시 멜키트족을

무찌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 부르테는 멜키트 족장 동생 치르게르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테무친은 자성과 회한 속에서

갈등하며 결국 어머니 호헤룬의 충고로 용서하고 포용하여 아내 부르테와 뱃속 아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호헤룬이 말하기를 '네 아내와 자식의 일도 포용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을

포용할 수 있겠느냐?) 이 아이가 첫째 아들, 몽골어로 손님을 뜻하는 '주치' 이다. 친자식과 다름없는 지위로

대제국 건설에 앞장 서고 나중에 흑해 연안까지 원정을 하여 하나의 나라 기틀을 마련하고 병으로 죽게 된다.

 

 

(당시 몽골에는 여자를 약탈하여 아내로 삼았다.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도 아내 호헤룬을 약탈하였다.

우리도 옛날에는 부부가 서로 얼굴도 모르고 혼례식날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각 나라의 관습이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것이고 역사가에 의해 평가되고 쓰여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삶이란 결국에는 자신 외

주변을 둘러싼 사람을 자기의 친구로 만드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면

결국 타인으로만 남게 된다. 진정으로 타인 또는 적을 친구로 만드는 길이 용서와 포용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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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의 이데아

 

 

 

   플라톤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동양에서는 공자의 논어, 자사의 중용 등 성리학의

   개념을 보면, 물질과 정신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본다. 공자가 말하는 인의예지신이나 성()

   그리고 중용에서 얘기하는 성()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 안에

   머리가 있고 정신이 있고 육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본체(本體) SUBSTANCE 와 현상(現象) PHENOMENON로 나누어 바라본다.

   즉 사람의 몸을 예 들면, 몸은 본체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 즉 변화되는 허상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자연, 동물과 식물, 사람이 만들어 낸 물건들은 모두 현상 즉 허상인 것이다. 보여지는 몸이

   현상이라면 본체는 무엇일까? 가령 사유하고 말하는 우리의 두뇌 정신이 본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의

   몸을 형성하는 궁극적인 원소가 본체일 수도 있거나, 아니면 신학에서 말하는 영혼 또는 영이 본체일 수도

   있다는 개념이다. 자동차는 여러 가지 금속 그리고 고무, 유리와 코팅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형태가 있다. 바로

   이것이 그 현상 즉 허상인 것이다. 그 본체는 원소 철 합금 규소 탄소화합물 이런 것들이 본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상의 세계, 신을 만들어내고 합리화와 객관화 과정을 거친다. 눈에 보이는 현상뿐만 아니라

   내면의 본체를 바라보면서 신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 과학과 문명발전의 통로가 되고 지평이 되는 것이다.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성장하고 성년이 되고 매일매일을 살지만, 비록 지금 이 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본체 같지만 이 순간도 늙어가고 변해가는 현상 즉 허상인 것이다. 결국 이십 년 삼십 년 후에는

   죽어서 땅에 묻히면 육신은 썪고 분해되어 자연의 원소로 되돌아간다. 그렇다면 내 본체는 남아 있는 것인가?

 

 

   물론 없을 것으로 본다. 우리몸이 원소로 분해되어 남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이미 공통의 성분으로

   우리몸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의하면 원소와 영혼으로 남아 결국에는 그러한 세계로 귀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세계가 동양에서 말하는 이상향(물론, 일원론적과 이원론적으로 다르지만)과 통하는 플라톤의

   이데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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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음과 있음(有無)


 


  



   우주는 끊임없이 없음과 있음의 반복이다. 인간의 앎과 창조 모방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를 믿음도, 무엇을 믿음도, 어떤 것을 믿음도, 그 없음도 마찬가지이다.


   고로, 오늘을 열심히 살고 내일은 없어질 뿐이다.


 


   내가 있는 한, 그 중심이고, 내가 없는 한, 그 없어짐이다.


   내가 죽는다면, 시신은 땅에 묻히겠지만, 나는 우주를 없어지게 한 것이다.


   고로, 오늘을 열심히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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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정 이지함과 깨진 도자기

 

                  

  

   토정 이지함은 조선 중기 선조 때 학자이고, 특히 사주명리학으로 유명한 토정비결을 지은

   예지가이지요! 지나가는 한 여담을 소개하면, 하루는 토정이 집에 있던 도자기 한 점의 상을 보니

   명이 다할 운이었다. 아니, 멀쩡한 도자기가 깨진다니, 신기하고 희한해서 오늘 하루는 그 도자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오전과 정오를 지나 오후 내내 해가 질 무렵까지 그 도자기는 온전했다. 마침 일을 마치고 부인이 돌아왔다.

   부인은 돈에 관심 없고 융통성도 없는 토정이 늘 불만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별나게 빈둥대고 있다. 드디어

   힘든 일을 마친 부인이 바가지를 긁어대는데 토정은 그 도자기에만 집중하여 관찰하며 부인의 말을

   무시했다.

 

   옆집 남편은 이래 잘하고~~ 관에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신용대출 좀?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순간 불끈

   토정이 지켜보던 그 도자기를 번쩍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자기는 크게 두 조각 나며 다시 잘게 박살났다.

   아! 내 도자기!! 결국 이렇게 운을 다하는구나! 자신이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토정은 그 도자기의 상을 보았지만, 자신과 엮인 운세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토정이 그 도자기가 깨질 운이라 보고 그냥 집을 나왔다면 그것은 온전했을까? 마침 바쁜 일로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다른 일을 보았다면, 부인은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 준비도 하고 또 방을

   청소 하다가 실수로 깨뜨릴 수도! 아니면 도둑이 들거나 다른 사람이 깨뜨릴 수도! 왜냐하면 깨질 운이었기에

   다른 사유로도 반드시 깨져야 되지 않았을까???

 

 

1. 보통 예지자라면 그 사건을 먼저 알고 관여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최종 확인하는 과정이어야 되는데, 여기서는 토정이 자기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물건으로 예지를 했기에, 결국에는 관여하게 됩니다. 토정의 부인이 도자기를 파손시킨 행위자가 되고, 토정은 부인이 도자기를 파손토록 감정을 상하게 하여 이성적 행동을 벗어나도록 하게 한, 일명 행위촉진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토정이 도자기가 깨질 것을 예지는 했으나, 급한 일로 집을 비운 사이에 부인이나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유로 깨졌다면, 예지도 훌륭하고 관여하는 것도 없어서 더욱 좋은 것이 아닌가?

 

2. 다음은 좀 더 넓게 보면, 토정이 그 도자기의 상을 보니 명을 다할 운이었다. 지켜볼 심산도 있었지만, 바쁜 약속으로 밖에 나갔다 해가 진 후, 돌아와 그 도자기를 보니 멀쩡했다. 다시 그 도자기의 상을 보니 온전한 상이었다. 그럼 전에 보았던 그 깨질 운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토정의 긍정적 행동으로 인해, 그 도자기의 운이 바뀌었단 말인가? 그 뒤로 오랫동안 그 도자기는 토정의 집에서 빛을 발했다. 결국 토정이 상을 보고 관여하였기 때문에 도자기의 운이 바뀐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은 어쩌면 많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글은 그 어떤 사실에 대한 증빙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냥 고등학교 때(1983년) 독일어 선생님(허O구)께서 여담으로 해줬던 말씀을 기억하여 다시 쓴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치열한 삶 속에서 잠시 토정 이지함에 대해 알아보고 보다 더 나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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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오후 일을 위해 야드를 걷다가, 문득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글귀가 떠오르며..... .

 작년 12월 돌아가신 선친을 생각하며 읊조리다가 또 8월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생각나고

 지금 저녁 이 순간에는 아주 먼 옛날 돌아가신 낳아주신 어머니도 생각난다.

 위 세 분과 또 한 분을 생각하며 효경에 나온 대목을 다시 읽어보고 써본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몸과 터럭 그리고 살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날리고 부모 앞에 나타나 기쁘게 함이 효의 끝이라!!"

 

 낳아주신 어머니는 아주 어려서 돌아가셔서 그 기억도 사라지고 추억으로 남아 있는 듯,

 대신 외할머니가 천지 없다 하며 보살피며 후원하시다, 양로원에서 작년 101세로 돌아가시고

 선친은 작년 12월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길러주신 어머님만 친재하신다.

 

 선친과는 생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맞지 않았고 장성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손자를 낳고 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사십이 넘어서면서 아내와 자식에게까지는

 되물려주지 말자 생각한 것이 그래도 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삶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에 묶여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중심에는 내가 있기에 더 늦기 전에 개선하여 성(誠)을 다하고 진실로 행복하다면

 천수를 누리고 혹여 이현부모 한다면 다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주의와 관리가 부족하여 사고나 질병, 

 교통사고를 일으켜 다치거나 또는 과로 과욕 그리고 음주 흡연으로 몸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한다.

 요새는 눈썹 문신도 얼굴성형도 있고, 또 질병이나 사고로 기형이 되어 행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잘 헤아려 가려서 처신해야 된다. 솔찍히 몸보다도 나약하고 비뚤어진 마음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안면기형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년 여성을 본 적이 있는데, 자신을 이겨내고 당당히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을 닦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도를 행하고 여기서 도를 행함은 좋은 일을 열심히 하여 세상을

 복되게 하고 그로 인해, 부를 축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공이란 개념은 다양하다. 공부를

 많이 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도 대통령이나 장관 차관, 그리고 판사와 검사, 장군, 백만장자 등

 많이 있지만, 이렇게 된다고 꼭 성공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얼마나 성을 다하며 본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참되고 진실된 삶을 또 그런 삶은 수명과 부귀가 보상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리고 철 없던 시절 사고를 많이 쳐 사람이 될까 했던 자가 개과천선하여

 성실히 산다면 이것도 또한 성공이라 볼 수 있다.

 

 행복은 마음에 달려 있고, 얼마나 맑고 밝은 정신으로 노력하고 성취하여 만족하느냐에 달린

 것은 아닌지? 진실로 정성을 다한다면 수명도 부귀도 따라온다고 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풍족히 쓸만한 의식주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성공이란 것도 그러하다고

 생각되고 그러한 사람이 부모 앞에 나타나 기쁘게 한다면 다행이 아니겠는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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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이지(困而知)

 

 

 

 

   惑生而知之 惑學而知之 困而知 及其知之 一也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 알고, 또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고

 

    또 어떤 사람은 곤욕스럽게 애써서 안다. (그러나, 결국) 그 앎에 도달함은 하나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것은 사람이 도달하여야 할 다섯 가지 도, 세가지 덕 知 仁 勇, 그리고 성(誠)을 가리킨다.

 

 

   참! 중용(中庸)에 나오는 좋은 말이다. 흔히들 천재(天才) 영재(英才)나 수재(秀才) 그리고 범재(凡才)

   그리고 또 둔재(鈍才)가 있다면,  빨리가든 늦게가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정성을 다해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천재(하늘이 내린 재주) 영재(탁월한 재주) 수재(빼어난 재주) 범재(평범한 재주) 둔재(둔한 재주)   

   차이가 클 수도 있지만, 삶과 업적을 따져볼 때 실제로는 적을 수 밖에 없다. 우화에 아무리 빨리 달리는   

   토끼라 하더라도 방심하면 자라한테 지기 마련이다. 인내와 극복 그리고 정성이 중요한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자녀를 교육하는 데는 수많은 기대와 낙담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자녀교육의 첫 출발점은

   부모 자기자신이다. 스스로 공부를 잘했는지 지금도 공부하고 있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녀를 어떻게 교육하여야 옳은지 그 길과 답이 보인다 하겠다. 또한

   이 세상을 거쳐간 많은 천재는 사실 99%의 땀과 1%의 머리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모든 사람의 일이 부단한 노력 즉 정성과 열정에 달려있다.  

   실제 우리 일은 하늘이 내린 천재, 탁월한 영재, 빼어난 수재보다는 열정을 갖고  

   땀 흘려 일한 평범한 범재와 특히 둔한 둔재의 몫이 크다 하겠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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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가도(白刃可蹈)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  백인가도야, 중용불가능야.

 

  흰 칼날은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

  좀 더 멋지게, 시퍼른 칼날 위에 올라설 수는 있지만, 중용은 할 수 없도다!!

 

  사실 그 말이 그 말이고 멋지게 해석하여 쓰는 것이 오히려 중요치 않다.

  그 의미를 모르고 실천하지 않으면 정말 쓸데없는 장식에 불과한 것이다.

  중용의 글귀를 읽고 해석하고 이렇게 블러그나 카페에 올리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중용(中庸)이란 무엇인가? 성(誠)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감성 그래서 마치 씨알처럼 감춰진

  보물 정수 그리고 그것이 싹 트고 자라서 줄기가 되고 꽃이 피듯, 잘 조화되어 아름답고

  착하고 참되어 더 나아가 만물을 관장할 수 있는 숭고한 정신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이 성(誠)이 나타날 때 중용을 따르고 실천해야 올바르게 된다고 본다. 

 

  사실 공자의 말씀이고 그 손자인 자사자(子思子)가 썼다고 일컬어지는 중용(中庸)에서는 

  홀로 있을 때 자신의 그림자에도, 자고난 後 덮은 이불에도 한치의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신독(愼獨)이라 하는데 이것을 강조한다. 또한 순임금의 지(知) 그리고 안회의 인(仁)

  자로의 용(勇), 인간의 지혜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숭고한 통찰력을 통한 범용적 삶

  즉 中道를 가르친다. 보편적 지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실행을 역설한다.

 

  그러면 이 위대한 참뜻을 참맛과 멋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을 뿐이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인간관계의 도를 행하고 수신제가를 거쳐 치국을 행하는 모든 인간의 도리를 정성껏 행하는

  실천수행에 달려있다 하겠다. 그러니 당연히 학생은 학업에 정진을, 회사원은 업무에 개선을

  관료는 나라의 일에, 대통령은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용의 첫걸음이라 본다.

 

  그렇지 않으면, 앵무새 사람말 흉내내듯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이 문귀는 작게나마 현실적으로 이렇게 들린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 아니 열을 알 수는 있어도, 부단히 죽는 날까지 깨우치기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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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표누항

 

 

 

   어제 저녁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좋은 음식 많이 먹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좋은 집에 사는 것 등등   

    그리고 남 앞에서 대접 받고 명예를 세우는 것 다 잊어 버리고 살자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이유가    

    첫째 제 분수를 알기 때문이다. 제 능력도 열정도 남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 제 분수도 모르고 돈과 명예를 쫓아 날뛰는 삶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더 소중한 것을 무엇보다도 사람의 맛을 잃어 버리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의 행복은 마음 즉 만족에 달려있지 물질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을 실천하고 꼭 잊어버리지 않도록 와신상담이라도 해야겠다. 

    단표누항의 삶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찌운다.   

 

 

   사(一簞飼) 한 공기의 밥, 일음(一瓢飮) 한 표주박의 물, 누항(陋巷) 좁고 허름한 거리   

   또는 줄여서 단사표음이라는 말도 있다. 한 줌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뜻한다.

 

    "한 공기의 밥, 한 표주박의 물 그리고 좁고 허름한 집"   

   우리에게 오히려 삶의 여유,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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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율초재

 

 

                                                             밴드, 블러그, 카페에서 인용되는 글이다. 직장과 일, 인생을 살다보면

                                                             터득되기도 하지만,  내 안에 적을 없애는, 자신을 개선하고 발전시키고

                                                             또 게으른 사람을 자극하는데 참 좋은 내용이다.

 

 

 

    (1190 ~ 1244) 몽골한국의 정치가. 거란족 출신으로 칭기즈칸이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현 뻬이징)를 함락시켰을 때 발탁됨. 당시 25세로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판단됨.

     칭기즈칸(1155 ~ 1227) 테무진 몽골한국의 1대 황제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다면 칭기즈칸에게는 '야율초재'가 있었다. 칭기즈칸이 초원의 유목민에 불과한

   몽골족을 이끌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야율초재라는 걸출한 책사(策士)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칭기즈칸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나 이민족과의 전쟁이나 중요한 일은 무엇이든 야율초재와 의논했다.

   출신성분을 따지지않고 오직 능력만 보고 인물을 썼던 칭기즈칸이 한낱 피정복민의 젊은 지식인에 불과했던

   야율초재를 그토록 신임했던 이유는 천문, 지리, 수학, 불교, 도교 할 것 없이 당대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그의 탁월한 식견 때문이었다.

 

   하늘과 땅과 인간, 그리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꿰뚫어 봤던 야율초재!

   그가 남긴 아주 유명한 명언이 하나 있다.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 하나의 이익을 얻는 것이 하나의 해를 제거함만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

 

    깊은 깨달음은 간결하고, 큰 가르침은 시대를 관통한다.

    서해안은 물론 동해안까지 중국어선이 싹쓸이 조업을 한다는 인터넷 기사가 있는데, 왜 그러한 대책도 없이

    해경을 해체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물론 세월호 사건에 적절한 조치를 하지 못한 무능함도 해경에 있지만,

    너무 주변에 군출신 인사로 판단이 막혀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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