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행운의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4일 ~ 6일)
1941년 12월7일 일본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연합함대 사령관, 기동함대 나구모 중장을 비롯한 大함대가
하와이 호눌루루 진주만 美태평양함대를 기습공격하여 당시 정박한 전함 애리조나,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테네시, 유타, 오클라호마 등(2만톤 ~ 4만톤) 20여척이 격침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넷,
요오크타운은 진주만에 없었다. 사실 일본이 좀 더 많은 정보력으로 세밀하고 대범하게 집중적 공격을 했더라면,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까지 연거푸 승리했다면? 아마도 오늘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항모가 진주만에 없었다는 것은
미국에게만 다행인 것이 아니라, 당시 식민지 시절 한반도에도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후 미국은 일본의 다음 공격 목표가 어디인가 알아내는데 급급했다. 당시 니미츠 제독이 미태평양함대 사령장관이었고
예하함대 하르제, 플레처, 스프루언스 제독 등이 있었다. 미드웨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니미츠 제독은 일본 통신감청中
미국의 어떤 지명을 가르키는 AF를 알아내기 위하여(첩보장교 로슈포르 중령) 미드웨이에서 오는 전문을 평상문으로 올리라
지시했다. '미드웨이 정수시설고장 식수부족' 이렇게 평상문으로 올려 일본의 정보를 역추적하는데 성공하였고, 일본쿠레(吳)를
출발하는 함대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재건함대로 전투함이 일본과 비교할 때, 50척 대 150척 정도로 상당한 열세를
보였다. 특히 항모는 3척 대 8척이었고(개조함 포함) 전함은 더욱 더 일방적인 차이를 보이며 많은 부분에서 밀렸다. 그러나
전쟁는 전력보다는 사전 첩보전과 정찰에 의한 선제공격 등 작전과 정신력이 중요함을 일깨워 준 역사적 해전이었다.
일본은 미드웨이 비행장 및 시설들을 파괴하고 美함대 항모들을 모두 찾아서 격침시키고 나면, 하와이를 점령하고 태평양의
제해제공권을 완전히 확보하고 대동아공영권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大함대를 세 개로 나누고
그 중 하나를 알류산 열도공격에 돌렸고 나구모 중장이 기동함대를 선두에서 끌고 한참 떨어져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이 전함 야마도에 좌승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첫째 함대전력이 분산되었고 함대간 간격이 너무 멀어 서로 공격과 방어를
호위할 상황이 되지 않았다. 둘째 함대노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함대간 무선을 금지하여 결정적 정보가 교류되지 못했다.
셋째 정찰기를 띄우는 상황이 고장, 날씨 등의 요인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 결과 기동함대 나구모 중장은 선두에 섰지만 피격
직전까지 美기동함대의 존재, 항공모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등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하였다.
일본함대가 미드웨이에 근접할 때 美함대는 이미 북동쪽에서 日함대를 기다리는 형상이 되었다. 기동함대 나구모 중장은
美함대 모함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미드웨이 공격을 위해 육상용 포탄으로 함재기에 장착하고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고
1차 공격을 한 후, 다시 2차 공격을 앞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1차공격대를 착함시키고 2차공격을 준비하고 또 美기동함대를
발견하고 긴급히 육상용 포탄을 장착한 공격기를 항모 공격용 포탄과 어뢰로 바꿔달고 하는 작전상 오류가 계속되었다.
속전속결 간단한 명령이 승패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처음의 정보 및 판단 오류가 전투내내 모든 것을 사로 잡았던 바이다.
미국은 이미 미드웨이 기지와 3대의 항모로부터 속속 폭격기와 뇌격기 전투기를 시시각각 발진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먼저 미드웨이에서 출발한 폭격기 편대가 일본함대 항모를 공격하였으나, 함대를 방어중이던 고성능의 일본 제로전투기
함포 등에 의해 근접하지 못했다. 이어 항모 호넷과 요오크타운에서 발진한 뇌격기와 폭격기도 막강한 일본 항공전력에
속속 격추되고 겨우 소수만 살아서 복귀하는 상황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회피하는 日함대와 쫓아가는 美전투폭격기와 공중전, 계속된 줄다리기에서 日함대를 찾던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美급강하폭격기들은 뒤쳐진 후미 구축함의 뒤를 쫓아 드디어 日함대를 발견했고, 어뢰공격을 하는 요오크타운 뇌격기들이
초계 전투비행하던 일본 제로기들과 공방전을 벌였고 제로기들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초계 위치를 이동해야 했고
그 방공권이 해제된 찰라에 항모를 급습 대공포화를 뚫고 급강하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공에서 연거푸 급습하는 돈트리스
급강하폭격기는 높은 고도에서부터 내리꽂으며 목표물을 타격하는 방식이었는데, 뇌격기 어뢰공격과는 차원이 다르게
그 공격은 아주 주효했다. 日함대는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드디어 美항모를 공격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데 거기까지였다.
불과 수십여 분 짧은 시간의 전황은 그토록 아끼고 늠름했던 일본함대 항공모함 아까기, 카가, 소류가 먼저 공격받아 격침되고
드디어 마지막 남은 기동함대 히류까지 美해군기의 밥이 되어 갑판에 포탄이 명중되고 유폭되면서 전력을 상실했고 최후를
맞이했다. 행운의 여신이 미국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함대의 남아있는 전함과 아직 공격받기前 히류 등에 美항모를 찾아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결과 美항모 요오크타운이 일본 전투기의 1차공격에는 긴급수리가 이뤄졌으나, 2차공격에
항행불능이 되고, 갑판이 기울면서 결국 모든 인원이 철수하고 다음날 새벽 일본 잠수함 어뢰에 의해 예인직전 침몰했다.
항모 요오크타운에서 전황을 용맹스럽게 지휘하던 플레처 소장은 함대지휘권을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이양했고 스프루언스
제독은 일본의 함대를 수차례 공격하여 많은 타격을 입혔지만, 함대를 동진하여 전장으로부터 회피하였다. 아마 당시 일본의
북방함대와 야마모토 사령관 본함대 병력만 집결하면 미국과 접전을 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치열한 공방전에 주요전력과
戰意를 상실했기에 결국 야마모토 사령관이 함대 복귀명령을 내리면서 이 海戰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지금 미국에는 니미츠급 첫번째 항공모함 이름이 니미츠이고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이 있다. 아마 이 전쟁의 승리 영웅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후 스프루언스 제독은 승승장구하며 1944년 6월 최대해전이었던 필리핀해전에서(사실 이때
전력 차이는 일본이 미국의 1/3정도에 불과했으므로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가 훨씬 값진 것이고 그것보다 더 큰 승리가 이순신
제독의 명량해전이었음. 아주 불리한 전력을 작전과 용기로 극복하며 대승을 거둔 전투가 진정한 대전이라 생각함) 미제5함대
사령관으로 승리의 주역이 되었고 나중에 미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일본함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1943년4월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 미군기에의해 격추되며 전사하는 운을 맞았다. 반면 니미츠 제독은 많은 전장을 누비고 맥아더 장군과
더불어 1945년 9월2일 도쿄만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일본 항복조인식에 조인하는 영광의 순간을 맞았다.
미국의 미드웨이해전 승리는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180도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순신 제독이 겨우 12척으로
왜선133척을 명량에서 격퇴하며 조선해군을 구한 영웅이 되었고 이것은 임진왜란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결과를 낳은
것 처럼....... .
만약 막강한 전력으로 일본이 승리했다면 미태평양 함대의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오늘의 역사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흐름이었다. 어쨌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진주만 기습 때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것은 아닌지?' 라는 의문은
실현되기 시작했다. 최대로 미국에 근접했지만, 그 정보전과 전술 무엇보다도 정신력과 집중력,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전에서 작은 차이가 어떤 때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역시 신은 가장 깨끗하고 거짓없는 마음 그리고 그 열정과 땀에 동정표를 주는가 보다.
참조) 태평양 전쟁 5권 및 화보집 1권

공습당하는 日항공모함 아까기(그림) 불타는 日항공모함 카가(그림)

대파된 日항공모함 소류 최후의 日항공모함 히류

갑판이 기운 침몰직전 美항공모함 요오크타운 美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美해군 항공모함 호넷
미드웨이 해전에서 핵심은 기동함대 즉 항공전력을 갖춘 항공모함을 찾아서 격침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인 해전이었다. 일본은 정찰과 정보작전, 속전속결과 상호협력에서 실패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정신력에서 벌써 안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