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겸손 겸양의 덕(德)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들어온 말이 겸손 겸양이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히는 것으로 그 사람의

 숭고한 정신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덕을 알지 못하고 역이용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으니

 사리분별이 필요한 대목이다. 내가 남보다 더 뛰어난 정신과 사랑을 가졌음으로 항상 굴하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과 몸이 다르듯이 생각도 행동도 정신도 다르다. 누가 더 좋고 나쁨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일 뿐이다. 먼저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인간의 도리, 가치와 역할 등을 배우는 것을 교육이라

한다. 인간관계를 맺고 일을 하면서 그러한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객관적이고

사회적 통념, 우리의 가치체계에 어긋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권선징악은 때로는 명백히

서술하고 경고하고 있다. 아무리 서로의 개성을 존중한다 해도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면 제재를 가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핵심인 돈과 권력, 명예를 가졌다고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고

상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겸손과 겸양의 덕을 실천하여 더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행복해

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산 정상에 올랐다가 반드시 다시 내려오는 것이 또한 인생이 아닌가?

보통 사람들, 그 만한 공부와 노력, 돈 그리고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평생에 고비가 몇 번 있을까?

없으면 좋겠지만 서너 번은 있지 않을까 싶다. 부부관계가 깨질 수도, 부자 모녀관계가 깨질 수도,

직장을 잃을 수도, 친구 동료와의 믿음에 단절이 갈 수도, 금전적으로 사업이 망할 수도…… .

 

그럴 때 다시 회복할 수도, 그냥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면 바로 이 겸손 겸양의 덕이다.

아울러 바보가 되고 웃음 거리가 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세상은 그 만큼 조잡한 것이고

자신의 능력과 지혜 또한 미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난관을 다시 개척할 힘과 지혜도 내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성경이나 불경을 읽고 부단히 노력해야 되겠지만 이 또한 성인의 마음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나의 마음일뿐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깨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의 절반이라도 발현된다면, 반드시 잃어버린

길을 되찾고 아름답고 행복한 길을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성현도 이런 위기를 극복하였고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지금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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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와 데미안 (2019 1121)

 

 

 

 

   2013년 6월

  누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이해했다고 재밌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실로 이해한다 재밌었다

  말한다면, 이미 헤르만 헤세를 이해한 문학도이기보다는 단순히 그냥 재밌게 일독한 독자일 가능성이

  열에 열이 아닐까 싶다. 고교1학년 때 여름방학 과제물로 헤르만 헤세는 처음 다가왔다. 그때는 무지의

  시대였고,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사회에 나간 후 20대후반에 진정으로 다가왔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덕분에 소설로의 연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 여느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서스이다" 라는 문장으로

  데미안을 단순히 이해된 것 처럼 말하기도 했다. 아프락서스는 신과 악의 의식을 모두 가진 존재, 음과 양의

  현실과 이상의 존재, 오늘을 열심히 사는 우리 자신의 희망으로 볼 수도 있다또 헤르만 헤세의 정신 세계과

  인간관을 투영하고 어쩌면 니이체의 초극된 자아 짜라투스트라일 수도, 유리알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연히 사십을 넘어서 읽으면 더욱 원숙하리라는 안도감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사십 중반을 넘어서 다시 접한 데미안은 아무런 답도 되지 못했다. 다시 무지와 혼돈의 세계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어쩌면 이 느낌이 상당히 옳은 감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허의 시대, 고통의 시대를 살았던

  헤르만 헤세의 지식 경험 사상 정서가 투영되었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가 되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십대에 읽었고 이십대후반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삼십대후반을 거쳐 사십대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왠지

  젊은 시절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게 되며 애틋하고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다.

 

 

  재밌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의 현실이 즐겁다면 이렇게 따분한 책은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요, 뭔가 공허함을

  느끼고 헤쳐나가고 싶다면 간절히 접근하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온 카인의 후예들, 표식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겁고 정겹게 다가온다. 싱클레어도 피스토리우스도 그리고 데미안도 에바부인도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기도 하고, 카인의 후예일 수도,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다.

  성경 구절. 카인과 아벨, 선과 악, 히틀러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반영되며 진한 여운을 울린다.

 

 

   참고) 성경 속의 카인과 아벨

 

   카인은 아벨의 형이다. 카인은 농부, 아벨은 목자(牧者)였다. 카인은 농산물을 야훼신에게 바치고 아벨은

   가축을 제물로 바쳤는데, 신은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반기고,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아우 아벨을 질투하여 죽이고 말았다. 노한 야훼는 그를 저주하여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 사람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 주었다. 이후 에덴 동쪽 놋 땅에

   살면서 아들 에녹을 낳았다( 4:16)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은 인간의 질투심과

   질투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어쨌든 카인은 인류 역사에서 살인자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아벨,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알려진 카인의 아우. 아담과 하와(이브)의 둘째아들이며 직업은 양치기였다.

   신앙심이 깊어 야훼신에게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며 신의 뜻에 잘 따랐는데, 결국 이를 질투한 형 카인에게

   살해당하였다. 가톨릭교회의 미사 전례문에는 아벨의 제물은 그리스도 희생의 전조로 묘사되어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일컫기도 한다.

                                                          블러그 음악사랑 [카인과 아벨성경 내용]에서

 

 

  2019 1121일 늦 가을!

  이런 생각이 든다. 아직 이 데미안을 오십대에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카인의 후예이다.

  성경의 말씀이지만, 진실한 목자이자 동생, 아벨을 죽인!

  그리고 표식을 지니고 참회하고 진실되게 살수 밖에 없으리요!!

 

  오천만의 한국인, 오천만의 얼굴과 본성이 이 땅에 살고 있다.

  다 소중하고 가치있다. 여기서 카인의 후예란 원죄를 지고

  태어나 표식을 지니고 죽지 않고 살아야만 되는 ... ... .

 

  태어나는 행복에 대한 보답을 하고 사는지, 어머니가 품에 안아 키우고 먹인 것에 대한 보답은 하는지?

  아버지가 몸이 닳도록 벌어온 돈에 대한 보답은 하는지, 애미 없는 자식이라 할머니가 보듬어 준 보답은

  하는지,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은 하는지, 친구의 괴롭힘에 대한 용서는 할 수 있는지,

  어떤 이의 다정한 미소에 기분 좋아진 것을 다른 이에게 배풀어 왔는지,  너무나 너무나 많다.

  끝으로 이런 것을 자식에게 철없이 강요를 하는 것은 아닌지, .............................................. .

 

  이런 것들을 알고 열심히 내몸은 내것이 아니니, 착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신나게 살면 되는 것이다.


  또, 웃으면서 즐겁게 즐기면서 살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열심히 신나게 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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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과 철

 

 

 

   

 

                             영월 법흥사계곡 상류 2014. 8. 5

 

 

 

   철이 드셨습니까? 대부분 막냇동생은 철이 없지요?

   과연 어떻게 해야 철이 든 것이고, 또 철이 들어야 좋은 것입니까?

 

 

   철이란 먼저 일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시절로 구분했을 때의 한 시기로 어떤 일을 하기에 알맞은 때를 말한다.

   또 화학 원소의 하나 은백색의 고체 금속으로 강한 자성을 띠며 원소 기호 Fe, 그러기에 견고하고 강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철은 사물의 이치를 분별할 줄 아는 힘이나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어려서나 나이를 들어서나 늘 철이 많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철이 더 들었다 덜 들었다 딱히 말하기

   도 어렵다. 객관적 논리적 기준이 불분명하고 상황에 따라 즉 철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모 라디오 방송에서 이 철에

   대하여 얘기 나누는 것을 가볍게 재밌게 청취하며 자연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런데 패널들은 쉽게 말하는 것 같지만,

   진지하고 정말 철이 든 사람들 처럼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았다.

 

 

   철이란 세상을 살면서 자연의 이치를 알고 거기에 맞춰 무엇을 해야 되는지 즉 자연에 순응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닫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관습과 도리가 되고 문화가 되는 것이지요. 즉 인간의 관습과 문화를 배우고 수용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당연히 정신적 물질적 문화와 교육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철이란 어떤 정형화된 성문화된 틀이

   아닌, 바로 우리의 두뇌 속에 잠재의식적이고 선험적인 분석 및 사고, 행동 과정을 통제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패널의 발언 중에 정신은 철들고 마음은 철들지 않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좋겠다는 말이 또 좋았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대대로 관습과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스스로의 범주를 만들고 그 틀 속에 대부분 안주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철이 들었다는 것은 일정 범주 안에서 그 사람을 신뢰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번뜩이는 창조성이랄까 인간이 배운 자연

   원초적인 창조 능력은 도리어 훼손되었다고 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드디어 사는데 그 알 속에 있으면 결국은 죽음이지요. 우리가 인간의 문화와 관습 속에 살아야

   하고 살 수 밖에는 없지만, 인간은 어쩌면 그러한 필연적 모순 속에 살지만, 우리의 문화와 관습을 탈피한 새로운 창조를

   위해 우리의 생을 바쳐야 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다 본다면, 세상을 이해하고 살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철들어야 하지만,

   또한 이 무지한 세상, 우리를 스스로 가두는 것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또한 철들지(비슷한 말로 순응하

   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은  땅에   머리는  하늘로,  발은  현실에  있지만  가슴은  우주로

                                                                                                           현실은  철들지만  이상은  철들지 않기를...... .

 

   아직도 막냇동생은 늘 철이 없다고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철이 없다면 헐 수 없고요…… .

 

 

 

 

 

 

 

 

 

 

 

 

 

 

 

 

 

 

 

 

 

 

 

 

 

 

 

 

 

 

 

   가을의 이름들(리바이벌)

 

 

   폭염, 장마 축축하고 후덥지근하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맑게 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가을의 이름을 뒤적여 본다.

 

 

   풍성한 결실의 계절 혹은 수확의 계절, 또 예로부터 내려오는

   독서의 계절 혹은 등화가친의 계절 그런데 이 것은 이제는 좀 않맞는 듯.

   독서는 아무 때나 가능하고 차라리 지금은 야외 활동의 계절이다.
   또 조락의 계절이란 말을 쓴다. 한 해의 생명을 다한 나무와 나뭇잎이

   시들고 떨어진다는 의미로 조락(凋落)이라 한다.

 

 

   끝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데.......  취업 진학 합격 승진의 계절

   올 해가 가기 전에 연애의 계절 그런가 하면 애석하게도 실연도 있고,

   잎을 다 떨구고 나면 남자의, 그리고 시와 수필이 떠오르는 문학의 계절

   한 해를 넘길 무렵 마음의 계절 ~~~~~~~~~~~~~~

   사람따라 감정따라 일따라 다양하기만 하다.

 

 

   어쨌든, 천고마비에 상엽이 홍어이월화라 ~~~~~~ 

   서리맞은 가을의 단풍든 잎이 이월의 봄꽃보다 더 붉다.

   아주 새빨갛고, 아주 샛노랗고 그리고 선명한 주황색 잎은

   실제로 봄꽃의 선명함과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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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와 블러그에서 좋은 글이란(1)
 
 
   정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幸福하고 즐거운 인생 즉 우리의 마음과 밀접하다는 것이다. 비록 글을 
   자주 쓰거나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 어려움이 있지만 말이다.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생각과 
   공부, 좋은 행동과 경험, 그리고 반성과 개선의 흐름이 원할하면 보다 좋은 말을 하는 것이고 또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흔히 막말, 상스러운 말로 쉽게 감정이 상하고 말 한마디에 천냥 빚 갚는 인생의 吉凶禍福, 喜怒哀樂
   말로 시작되고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도 역시 마찬가지로 인생의 항로와 같이 간다. 글이라고 
   말보다는 더 향기롭고 좋은 것은 아니다. 말과 경로는 다르지만 똑 같은 마음과 의사표현의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글의 홍수, 범람 속에 헤매이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글은 진정으로 필요에 의해 마음으로부터 쓰여질 때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즉 그 순간이
   아름답고 영원히 가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바뀌면 그 글은 이미 
   지나간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순간의 정서 느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은 영원하지만 
   또한 그 순간에 한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블러그나 카페만 보더라도 재밌는 글이나 좋은 글이라 생각되는 것은 무조건 카피에 카피.
   그 순간 글이 아니라 단순한 카피에 의한 도안에 불과한 것이 된다. 글 또한 마음과 의사표현의 
   수단이란 관점에서 보면, 어떤 때는 쓸데없는 쓰레기에 불과한 행위가 된다는 말이다. 지식의 내용은 
을 수 있지만, 어떻게 그 느낌이나 정서가 같을 수 있겠는가?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 경험 대화 사색의 요소를 서로 공유하는 흐름으로 보면 된다.
   물론 글을 읽는 사람 즉 독자의 일방적인 행위이지만 꼭 그렇지 않다. 엄연히 정신적 마음의
   교류와 책임이 뒤따른다. 그럴 때 좋은 독서가 시작되는 것이고 또한 좋은 글이 되는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여, 좋은 글이란 재밌고 웃음과 용기를 주고 삶의 활력을 주면 되는 것이다. 
   어법이나 맞춤법이 틀리거나 띄어 쓰기가 틀려도 좋은 글이다. 올바른 마음 즐거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이 광고 하고 사람이 모여들고 카피하여 잘라내고 첨언첨부하여
   자기 글로 만들어 올려도 교류와 책임의 과정을 겪으면 그래도 좋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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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의 힘,  진취적 기상

 

 

 

 

 

 

    우리가 흔히 쓰는 말 ’ ‘아니오는 질문에 대한 논리적 사고와 판단에 의한 의사표시의 일종이다.

 

   다만 얼마 만큼 잘 논리적으로 사고하여 판단했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 그러한 논리적 사고 판단을

 

   근거로 하여 하고자 하는 일 또는 목표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예 할 수 있습니다또는 아니오 안됩니다이 문장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크나큰 반전을 가져왔다.

 

   즉 긍정적 사고로 난관을 극복하고 실행하느냐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할 수 없느냐 이 말이다. 논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둘 다 옳다. 그런데 나의 존재 이유, 우리의 존재 이유로 볼 때는 아니다. 모든 역경과 난관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 할 수 있습니다 Yes I can 이 되어야 한다.

 

 

 

 

   지금 일본 히로시마의 한 작은 섬에 머물러 있다. 배를 타고 들어와 오오사키카미지마(大崎上島)라는 섬에서

 

   석 달 정도 일해야 된다. 또 숙소는 더 작은 섬으로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숙소 주변에 민가가 네 채.

 

   온통 산과 바다이고 주민들이 드문드문 텃밭으로 밀감을 경작하고 있다. 왜가리, 까마귀, 매가 돌아다니고

 

   참새와 멧새 노고지리 등등 이름모를 많은 새가 지저귀고 밤에는 멧돼지도 내려오는 어둠 속에 적막 강산이다.

 

   한국에서도 경험치 않은 일을 여기서 하고 있다. 며칠이 지나니 안정이 되고 좋은 경험을 하고 있고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 마음이 든다.

 

 

 

      

    

     숙소 옆 해변 간조 만조 때는 방파제 밑까지 물이 찬다.                          숙소 옆 대나무 숲, 한국보다 더 크고 두껍다.

 

 

 

 

 

                                                                   

 

   마음이 안정되고 긍정적 생각으로 기()가 충만할 때 진취적 기상이 생기는 법이다. 즉 긍정의 힘이 있어야

 

   하고자 하는 열정 의지와 결합되고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 힘으로 인내하며 끝까지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될 일이 없는 것이. 실패하면 또 일어서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고 인생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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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도난마 한국경제 선택(1)

 

 

 

높은 산에 올라가 세상을 바라다 보면, 발아래 세상이 보인다. 어떤 때는 참 철없어 보인다. 그런데 내려오면서 그러한 호연지기는 서서히 사라지고 나는 더 철없어진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했다. 바쁜 일상에 하루하루, 일년이 쏜살같이 흘러가지만 독서를 부단히 해야 된다. 정독이 있고 다독이 있다. 정독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빠뜨리는 것 없이 이해하며 읽는 것을 말하고 다독은 많은 책을 읽는 것이다. 교양을 위해 이 책은 정독할 필요가 있고 일독에 이해가 어려우면, 두번 읽어보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 쾌도난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역시 선택의 문제이다.

 

대담형식을 빌린 수필(에세이)로써 현재 한국경제 현실과 세계적 흐름을 특히 주주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한국의 경제 유동성 위기(1997), 유럽 및 세계경제 위기선순환 복지이론 등등 일정한 관점에서 얘기하고 주장한 글로 좋은 지식과 정보, 그리고 그 방향성 등 올바른 이해를 가져다주었다. 원론적인 면을 탈피한 글로 접근을 쉽게 하지만 또한 많은 지식의 부족과 공부를 하게끔 한다. 학창시절에 들었던 자기자신의 눈곱을 떼어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관심있고 흥미로운 내용을 추려 보고 또 이해가 적었거나 관점이 다른 부분에 대하여도 적어 본다.

 

먼저 복지하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너무 혜택이 많으면 근로의욕이 떨어져 오히려 게을러 진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선순환 보편적 복지개념으로 몇 가지 예는 현실에 잘 맞는다. 가령 사십대 중반 가장이 구조조정을 당했다면 현재 시스템으로는 9개월 정도 120만원/월 나라에서 주는 혜택이다. 게다가 아파트 담보대출까지 겹친다면 퇴직금은 고사하고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 그러니 당연히 구조조정에 목숨을 걸 수 밖에…… . 500만원을 받는다면 다만 350만원이라도 생활안정자금으로 받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 및 훈련제도가 갖춰진다면 사회의 불안 요소가 그 만큼 사라진다. 보편적 복지정책이 필요한 선진 산업화 사회가 되었다고 본다. 

 

둘째 재벌개혁 내지는 재벌타파는 어쨌든 산업발달 과정에서 파생된 정경유착 특혜의 하나로 생각하는데 미국이나 유럽은 더 많은 국가적 지원과 그룹의 생존을 위한 장치로 엮어져 있고 그것이 그 나라 산업의 중추가 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재벌을 해체한다면 오히려 외국자본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결국에는 온갖 이익만 먹고 튀는 먹튀에 불과한 투기자본에의해 국민경제와 노동안정성은 더욱 곤궁에 빠지므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언뜻 떠오르기도 한다. 일리가 있다는 판단이 들지만 저자들은 뉴라이트적 입장에서 재벌을 옹호하고 잘못된 점을 개선하자는 취지이지만, 정의실현의 양심에서 본다면 상대적인 약자나 노동자 서민을 위한 그 공정성이나 진정성에 의문이 가는 바, 보다 더 올바른 방향으로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국민의 개혁의지가 꼭 필요한 부분이다.

 

장하준 교수하면 케임브리지 경제학 박사이고 대학에서 부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정승일 저자는 독일에서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특히 복지정책에 대한 지식이 탁월하고 이종태 저자도 정치경제학에 대해서 전문기자이다. 케임브리지하면 세계대공황기 투자승수이론으로 경기부활을 주창했던 케인즈가 떠오른다. 그후 많은 분야로 세분화 접목되면서 현재에서도 그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솔찍히 지금은 미국의 시카고나 하바드, MIT 등의 학파가 대세가 아닌가 생각된다. 단조로웠던 과거의 시대 이론에 집착한 논리는 급변하는 오늘날에는 그 적용과 성공이 한계가 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에 맞게 과감히 뜯어 고쳐야 된다고 본다.

 

아울러 몇가지 관점이 다르거나 의문이 가는 사안에 대하여 적어본다.  첫째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쿠테타에 의한 정권획득 그리고 유신독재의 장본인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가난하고 혼탁에 빠진 나라를 경제개발5개년 계획 및 실행, 새마을 운동 등으로 산업화를 이끌었으며 그 초석으로 80, 90년대 거쳐 지금의 부흥을 맞았다고 본다. 결국 마지막 가는 길은 부하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이 그 출발 군사 쿠테타와 상통한다 하겠다. 그런데 그 경제규모를 보면 1964 1억불, 1971 10억불, 1977 100억불 돌파 그리고 그 이후 1983 200억불 이래로 최근 2011 5552억불 무려 50배에서 50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것은 성인과 초교생과의 차이 이상으로 몸도 정신도 그만큼 수백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오늘날에 살았다면 더 잘했을 것이다 라든지 그때의 제도나 의지로 지금에 정치경제를 하면 이라든지 하는 추측은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다.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그러한 특수한 상황이 어떻게 2012년 지금의 소위 뉴라이트 등에 의해 찬송 받는지 그 상황 배경이 의심스럽다.

 

둘째 한- FTA와 한-EU FTA가 패착이라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유주의는 시장주의이고 무역이고 그러한 무역 및 관세 일반적 사항에 대한 일종의 협정인데 스포츠나 게임에서 상수가 하수에게 칫수나 어드벤티지를 주고 진행하다가 그 실력이 올라감에 따라 비로서 동등조건에서 첫승을 올리는 순간 공정경쟁 체제에 진입했다 얘기할 수 있는데, 아직도 한국은 경제 선진국에 비해 취약하므로 계속 통제를 해야 한다는 의미인지? 유럽은 하나의 경제공동체 개념이고 남미도 동남아도 그렇고 그런데 한국은 주변 강대국,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치열한 무역전쟁을 하는 상황인데 과연 FTA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자는 말인지? 아니면 단순히 좌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얘기인지? 한국의 경제발전을 볼 때 처음에는 보호주의 관세 및 비관세 정부지원이나 규제 등등에서 발전하여 신흥경제개발국, 지금은 OECD에 가입한 경제선진국 수준이다 어쨌든 아직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문의 발전을 이끌기 위해서 전략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힘을 기르면서 개방하고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물론 다수는 추락하겠지만…… . 이것이 당연한 수순인데 FTA말고 또 다른 좋은 대책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하면 로망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인가?

 

셋째 과연 이 저자들이 비판하는 좌파신자유주의 라든지 시장개혁파들은 어떤 주장을 펴는지? 저자들의 주장이 오류가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특히 한국의 주주자본주의와 재벌개혁 및 기업의 역할과 미래, 또 잘 포장된 관치의 산업정책! 이런 것은 잘못 사용하면 기득권 세력의 방패막이 역할 밖에는 안되므로 정의와 평등 그리고 국가경제에 맞는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 현재 미국이나 서구의 주주자본주의에 대하여 아주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오히려 이것은 현주류를 이해하지 않는 유연성 부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 세상의 일을 하는데 여러가지 관점과 방식이 있는데 가장 현명한 부류는 원칙과 이론을 충분히 통달하고 오히려 창조적인 유연성으로 대처한다고 본다. 그 보다 한수 아래는 그러한 유연성이 부족하여 원칙과 이론을 중시하고 강직하고 모범적인 일을 실천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유연성도 부족하여 노력이 필요한 보통 부류이다.

 

바쁜 일상에서 이렇게 흥미롭고 재밌는 책을 접하다 보면, 어떤 때는 참 행복해진다. 가을이라는 시간도 느끼고 정신도 맑고 건강해진다. 같은 사안을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고 너도 옳고 나도 옳은데 논쟁하는 것을 보면 흥미롭고 재밌기도 하고, 참 철없어 보이기도 한다. 예전에 자주 갔던 영남알프스 신불산 취서산 그리고 시살등 능선을 다시금 땀과 사색에 젓으며 걷고 싶어진다.확트인 능선에서 좌우를 내려다 보며 억새평원을 계속 지나고 취서산을 지나면 바위가 제법 어우러진 바위능선이 나타나고 조금 더 가면 브로캔 현상을 목격했던 그 바위가 나온다. 높은 산에 올라가 세상을 바라다 보면, 발아래 세상이 보인다. 어떤 때는 참 철없어 보인다. 그런데 내려오면서 그러한 호연지기는 서서히 사라지고 나는 더 철없어진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올해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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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물건(관념을 깨라)

 

 

 

'남자의 물건'에 관심 있냐고 묻자, "차범근의 물건은 무척 관심 있는데,  안성기, 조영남의 물건은

아무 관심 없네요!" 왜냐니까, 안성기는 이름만 '국민애로배우'지 집 밖에서는 전혀 쓸데없는 물건이라고

소문났고, 조영남의 경우는 노인네 물건 봐봐야 보는 자기 눈만 손해란다. 김정운교수 著 [남자의 물건]에서

 

남자 차범근의 물건 계란 받침대, 남자 안성기의 물건 스케치북, 남자 조영남의 물건 안경이 등장한다.

물론 그 외 여러 남자의 물건이 등장한다. 마치 얼굴 맞대고 대화하듯이 자유롭고 부드러운 문체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사랑스럽고 자유롭고 조화롭게 한다.

 

남자의 물건은 과연 있어야 되는가? 오래 사용하여 손때가 묻고 정이 가는, 사연이 있고 추억이 있는

그런 물건 말이다. 또한 남자의 물건이 있다는 것은 관념에 사로잡힌다 익숙해진다 즉 늙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없다. 으뜸으로 생각하는 관념도 사상도 딱히 없다. 있는대로 내 물건으로 받아들이고

관념이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할 뿐이다. 이것은 반대로 가진 것이 없고 아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관념(이데올로기)으로부터 자유럽고 사랑스럽고 조화로워지자. 탈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소한 이데올로기의 어리석은 볼모는 되지말자. 보수주의 진보주의 급진주의니

하는 것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독재주의 등등 말이다. 다 먹고 살자고 내가 이땅에

살고 있음을 표출하는 출구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 우수운 얘기다. 그러나 또한 목숨을 잃을 정도로 무서운 얘기다.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이데올로기와 싸우고 또 싸우고 죽고 죽어갔다. 만약 남북한이 한세대 안에 통일된다면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신이데올로기는 다 우수운 얘기가 된다. 그땐 그랬지? 다 지나간 에피소드2에 불과한 얘기다.

 

극우 우파 좌파 급진 친북 심지어 좌빨 다 옳은 얘기다. 바로 사는 얘기고 내가 살아있소 떠드는 얘기다.

한국전쟁 때 미국은 한국을 지원해 우리의 든든한 우방이 되었다. 1세기 이상 한국의 우방은 미국이다.

그런데 불과 400년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든든한 우방은 명(중국)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은 우리를 지원해

왜의 침략으로부터 막아줬다. 물론 미국이나 명나라 둘 다 나름대로 계산된 것이 있었다.

 

일제는 피폐한 조선땅에 전쟁과 수탈을 위해 철도도 공장도 그리고 개혁을 강제로 시켰다. 차라리 망하는

조선보다 개혁에서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로부터 참탈의 이력은 그 몇백배에 이르는지

가늠할 수 없다.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한다. 힘이 있으니 독도는

우리땅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그랬으면 성리학의 원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도 있겠는가?

모든 것은 사람의 일이다. 정신을 올바르게 가지고 실천해야 된다. 그 정신이 망한 개인이나 사회 국가는

반드시 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느리게 가면 보수주의, 불인정하고 빨리가면 진보 개혁. 흔히 우리가 아는 공산주의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구소련 붕괴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북한도 공산주의가 아닌 일당 독재국가에 불과하다.

중국은 사회주의이지만 자본주의적 산업국가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독재주의에 버금가는 큰 이념으로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맞는 관념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이 대륙 국가와 민족 문화에 맞게

서로간에 섞이고 새로운 사조와 변화되고 발전 성장하면서 사람을 볼모로 잡는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남자의 행복과 진실 사랑이 묻어 있는, 진한 사연이 담겨있는 물건도 좋다. 다 살아가는 얘기이다.

그러나 항상 깨어있어서 쓸데없는 관념(이데올로기)의 추악한 볼모는 되지말자. 다 그땐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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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과 행운의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4일 ~ 6일)

 

 

 

 

 




 

 

 

 

 

 

  1941년 12월7일 일본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연합함대 사령관, 기동함대 나구모 중장을 비롯한 大함대가

  하와이 호눌루루 진주만 美태평양함대를 기습공격하여 당시 정박한 전함 애리조나,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테네시, 유타, 오클라호마 등(2만톤 ~ 4만톤) 20여척이 격침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넷,

  요오크타운은 진주만에 없었다. 사실 일본이 좀 더 많은 정보력으로 세밀하고 대범하게 집중적 공격을 했더라면,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까지 연거푸 승리했다면?  아마도 오늘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항모가 진주만에 없었다는 것은

  미국에게만 다행인 것이 아니라, 당시 식민지 시절 한반도에도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후 미국은 일본의 다음 공격 목표가 어디인가 알아내는데 급급했다. 당시 니미츠 제독이 미태평양함대 사령장관이었고

  예하함대 하르제, 플레처, 스프루언스 제독 등이 있었다. 미드웨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니미츠 제독은 일본 통신감청中

  미국의 어떤 지명을 가르키는 AF를 알아내기 위하여(첩보장교 로슈포르 중령) 미드웨이에서 오는 전문을 평상문으로 올리라

  지시했다. '미드웨이 정수시설고장 식수부족' 이렇게 평상문으로 올려 일본의 정보를 역추적하는데 성공하였고, 일본쿠레(吳)를

  출발하는 함대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재건함대로 전투함이 일본과 비교할 때, 50척 대 150척 정도로 상당한 열세를

  보였다. 특히 항모는 3척 대 8척이었고(개조함 포함) 전함은 더욱 더 일방적인 차이를 보이며 많은 부분에서 밀렸다. 그러나

  전쟁는 전력보다는 사전 첩보전과 정찰에 의한 선제공격 등 작전과 정신력이 중요함을 일깨워 준 역사적 해전이었다. 

 

 

 


 

 

  일본은 미드웨이 비행장 및 시설들을 파괴하고 美함대 항모들을 모두 찾아서 격침시키고 나면, 하와이를 점령하고 태평양의

  제해제공권을 완전히 확보하고 대동아공영권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大함대를 세 개로 나누고

  그 중 하나를 알류산 열도공격에 돌렸고 나구모 중장이 기동함대를 선두에서 끌고 한참 떨어져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이 전함 야마도에 좌승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첫째 함대전력이 분산되었고 함대간 간격이 너무 멀어 서로 공격과 방어를

  호위할 상황이 되지 않았다. 둘째 함대노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함대간 무선을 금지하여 결정적 정보가 교류되지 못했다. 

  셋째 정찰기를 띄우는 상황이 고장, 날씨 등의 요인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 결과 기동함대 나구모 중장은 선두에 섰지만 피격

  직전까지 美기동함대의 존재, 항공모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등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하였다.

 

 


 

 

 

  일본함대가 미드웨이에 근접할 때 美함대는 이미 북동쪽에서 日함대를 기다리는 형상이 되었다. 기동함대 나구모 중장은

  美함대 모함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미드웨이 공격을 위해 육상용 포탄으로 함재기에 장착하고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고

  1차 공격을 한 후, 다시 2차 공격을 앞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1차공격대를 착함시키고 2차공격을 준비하고 또 美기동함대를

  발견하고 긴급히 육상용 포탄을 장착한 공격기를 항모 공격용 포탄과 어뢰로 바꿔달고 하는 작전상 오류가 계속되었다.

  속전속결 간단한 명령이 승패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처음의 정보 및 판단 오류가 전투내내 모든 것을 사로 잡았던 바이다.

  미국은 이미 미드웨이 기지와 3대의 항모로부터 속속 폭격기와 뇌격기 전투기를 시시각각 발진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먼저 미드웨이에서 출발한 폭격기 편대가 일본함대 항모를 공격하였으나, 함대를 방어중이던 고성능의 일본 제로전투기

  함포 등에 의해 근접하지 못했다. 이어 항모 호넷과 요오크타운에서 발진한 뇌격기와 폭격기도 막강한 일본 항공전력에

  속속 격추되고 겨우 소수만 살아서 복귀하는 상황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회피하는 日함대와 쫓아가는 美전투폭격기와 공중전, 계속된 줄다리기에서 日함대를 찾던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美급강하폭격기들은 뒤쳐진 후미 구축함의 뒤를 쫓아 드디어 日함대를 발견했고, 어뢰공격을 하는 요오크타운 뇌격기들이

  초계 전투비행하던 일본 제로기들과 공방전을 벌였고 제로기들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초계 위치를 이동해야 했고

  그 방공권이 해제된 찰라에 항모를 급습 대공포화를 뚫고 급강하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공에서 연거푸 급습하는 돈트리스

  급강하폭격기는 높은 고도에서부터 내리꽂으며 목표물을 타격하는 방식이었는데, 뇌격기 어뢰공격과는 차원이 다르게

  그 공격은 아주 주효했다. 日함대는 마지막 고비만 넘기면 드디어 美항모를 공격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데 거기까지였다. 

  불과 수십여 분 짧은 시간의 전황은 그토록 아끼고 늠름했던 일본함대 항공모함 아까기, 카가, 소류가 먼저 공격받아 격침되고

  드디어 마지막 남은 기동함대 히류까지 美해군기의 밥이 되어 갑판에 포탄이 명중되고 유폭되면서 전력을 상실했고 최후를

  맞이했다. 행운의 여신이 미국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이었다.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함대의 남아있는 전함과 아직 공격받기前 히류 등에 美항모를 찾아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 결과 美항모 요오크타운이 일본 전투기의 1차공격에는 긴급수리가 이뤄졌으나, 2차공격에

  항행불능이 되고, 갑판이 기울면서 결국 모든 인원이 철수하고 다음날 새벽 일본 잠수함 어뢰에 의해 예인직전 침몰했다.

  항모 요오크타운에서 전황을 용맹스럽게 지휘하던 플레처 소장은 함대지휘권을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이양했고 스프루언스

  제독은 일본의 함대를 수차례 공격하여 많은 타격을 입혔지만, 함대를 동진하여 전장으로부터 회피하였다. 아마 당시 일본의

  북방함대와 야마모토 사령관 본함대 병력만 집결하면 미국과 접전을 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치열한 공방전에 주요전력과

  戰意상실했기에 결국 야마모토 사령관이 함대 복귀명령을 내리면서 이 海戰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지금 미국에는 니미츠급 첫번째 항공모함 이름이 니미츠이고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이 있다. 아마 이 전쟁의 승리 영웅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후 스프루언스 제독은 승승장구하며 1944년 6월 최대해전이었던 필리핀해전에서(사실 이때

  전력 차이는 일본이 미국의 1/3정도에 불과했으므로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가 훨씬 값진 것이고 그것보다 더 큰 승리가 이순신

  제독의 명량해전이었음. 아주 불리한 전력을 작전과 용기로 극복하며 대승을 거둔 전투가 진정한 대전이라 생각함) 미제5함대

  사령관으로 승리의 주역이 되었고 나중에 미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일본함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1943년4월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 미군기에의해 격추되며 전사하는 운을 맞았다. 반면 니미츠 제독은 많은 전장을 누비고 맥아더 장군과

  더불어 1945년 9월2일 도쿄만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일본 항복조인식에 조인하는 영광의 순간을 맞았다.

 

 

 

 

 



 

 

 

 

   미국의 미드웨이해전 승리는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180도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순신 제독이 겨우 12척으로

   왜선133척을 명량에서 격퇴하며 조선해군을 구한 영웅이 되었고 이것은 임진왜란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결과를 낳은

   것 처럼....... .

 

 


   만약 막강한 전력으로 일본이 승리했다면 미태평양 함대의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오늘의 역사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흐름이었다. 어쨌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진주만 기습 때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것은 아닌지?' 라는 의문은

   실현되기 시작했다. 최대로 미국에 근접했지만, 그 정보전과 전술 무엇보다도 정신력과 집중력,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전에서 작은 차이가 어떤 때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역시 신은 가장 깨끗하고 거짓없는 마음 그리고 그 열정과 땀에 동정표를 주는가 보다.

 

  

 

 

 

 

 

 

   참조) 태평양 전쟁 5권 및 화보집 1권

 

 

 

 

 

 

 

 

       

                       공습당하는 日항공모함 아까기(그림)                                      불타는 日항공모함 카가(그림) 

 

 

 

 

 

 

 

 

       

                                       대파된 日항공모함  소류                           최후의 日항공모함 히류

 

 

 

 

 

 

 

 

 

 

 

      

        갑판이 기운 침몰직전 美항공모함 요오크타운                                                    美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美해군 항공모함 호넷

            

 

 

 

 



 

 

 

   미드웨이 해전에서 핵심은 기동함대 즉 항공전력을 갖춘 항공모함을 찾아서 격침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인 해전이었다. 일본은 정찰과 정보작전, 속전속결과 상호협력에서 실패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정신력에서 벌써 안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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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연

 

 




 

   아주 오래 前 첫 사랑의 연인이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40여년 前 한국 한 대학생이 학기를 마칠 무렵 일본 도쿄 근처 항구도시를 여행하다가 같이 온 친구들과 카페에서

   아가씨들과 미팅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편지왕래 방문 등 우정과 사랑을 싹틔우다 결혼을 약속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결국 헤어지고 따로따로 모른 채 40여 년이 지나 나카사키 한 카페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둘은 말은 안통했지만,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묵언의 시간을 가지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피천득 선생의 [인 연] 이란 수필이 뇌리를 스치며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조선의 열일곱 살 어린 학생이 일본에 유학가서 머무르는 하숙집에 아주 어린 여자 아이의 이름이 아사코였다.

   황폐한 조선 그리고 외로움 속에 처음 접해보는 좋은 환경과 따뜻한 가족은 그리움을 넘어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침이슬과 같은 아사코의 눈망울은 그 모든 것을 순화시켰다. 그리고 다시 고국에 돌아와 10년이

   흐른 뒤 방문할 기회에 그 하숙집을 찾았다. 아사코는 풋풋하고 청순한 스무여 살 대학생이 되었다. 사랑을 약속하고

   인연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지만 암울한 현실과 마음 사이 갈등했다. 결국 서로 말못할 미련을 뒤로 한채

   다시 또 기약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또 10년이 더 지나 다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세번째 만난 아사코는

   원숙하고 아름다움의 절정을 염원했던 그 얼굴이 아닌 미국계 일본인 2세와 결혼하여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다. 아름답고 활짝핀 장미가 아닌 시들어가는 백합과도 같았다. 차라리 세번째는 만나지 말아야 하였거늘...... .

 

 

 

   그리고 또 황순원의 [소나기] 그리고 알퐁스 도데의 []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이루지 못한 사랑, 아니 청순하고

   순수한 사랑은 이렇게 그 순간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만족해야 되는가? 차라리 그 자체로 가슴에 묻고 영원히 간직하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랑인가 보다. 그리고 이 4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이 첫 사랑의 연인은 그 것을

   끝으로 가슴에 묻고 또 살아야 된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감동이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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