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와 데미안 (2019 1121)

 

 

 

 

   2013년 6월

  누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이해했다고 재밌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실로 이해한다 재밌었다

  말한다면, 이미 헤르만 헤세를 이해한 문학도이기보다는 단순히 그냥 재밌게 일독한 독자일 가능성이

  열에 열이 아닐까 싶다. 고교1학년 때 여름방학 과제물로 헤르만 헤세는 처음 다가왔다. 그때는 무지의

  시대였고,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리고 사회에 나간 후 20대후반에 진정으로 다가왔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덕분에 소설로의 연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 여느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서스이다" 라는 문장으로

  데미안을 단순히 이해된 것 처럼 말하기도 했다. 아프락서스는 신과 악의 의식을 모두 가진 존재, 음과 양의

  현실과 이상의 존재, 오늘을 열심히 사는 우리 자신의 희망으로 볼 수도 있다또 헤르만 헤세의 정신 세계과

  인간관을 투영하고 어쩌면 니이체의 초극된 자아 짜라투스트라일 수도, 유리알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연히 사십을 넘어서 읽으면 더욱 원숙하리라는 안도감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사십 중반을 넘어서 다시 접한 데미안은 아무런 답도 되지 못했다. 다시 무지와 혼돈의 세계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어쩌면 이 느낌이 상당히 옳은 감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허의 시대, 고통의 시대를 살았던

  헤르만 헤세의 지식 경험 사상 정서가 투영되었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가 되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십대에 읽었고 이십대후반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삼십대후반을 거쳐 사십대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왠지

  젊은 시절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게 되며 애틋하고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다.

 

 

  재밌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의 현실이 즐겁다면 이렇게 따분한 책은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요, 뭔가 공허함을

  느끼고 헤쳐나가고 싶다면 간절히 접근하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온 카인의 후예들, 표식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겁고 정겹게 다가온다. 싱클레어도 피스토리우스도 그리고 데미안도 에바부인도

  헤르만 헤세의 분신이기도 하고, 카인의 후예일 수도,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다.

  성경 구절. 카인과 아벨, 선과 악, 히틀러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반영되며 진한 여운을 울린다.

 

 

   참고) 성경 속의 카인과 아벨

 

   카인은 아벨의 형이다. 카인은 농부, 아벨은 목자(牧者)였다. 카인은 농산물을 야훼신에게 바치고 아벨은

   가축을 제물로 바쳤는데, 신은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반기고,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아우 아벨을 질투하여 죽이고 말았다. 노한 야훼는 그를 저주하여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 사람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찍어 주었다. 이후 에덴 동쪽 놋 땅에

   살면서 아들 에녹을 낳았다( 4:16)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은 인간의 질투심과

   질투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어쨌든 카인은 인류 역사에서 살인자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아벨,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알려진 카인의 아우. 아담과 하와(이브)의 둘째아들이며 직업은 양치기였다.

   신앙심이 깊어 야훼신에게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며 신의 뜻에 잘 따랐는데, 결국 이를 질투한 형 카인에게

   살해당하였다. 가톨릭교회의 미사 전례문에는 아벨의 제물은 그리스도 희생의 전조로 묘사되어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일컫기도 한다.

                                                          블러그 음악사랑 [카인과 아벨성경 내용]에서

 

 

  2019 1121일 늦 가을!

  이런 생각이 든다. 아직 이 데미안을 오십대에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카인의 후예이다.

  성경의 말씀이지만, 진실한 목자이자 동생, 아벨을 죽인!

  그리고 표식을 지니고 참회하고 진실되게 살수 밖에 없으리요!!

 

  오천만의 한국인, 오천만의 얼굴과 본성이 이 땅에 살고 있다.

  다 소중하고 가치있다. 여기서 카인의 후예란 원죄를 지고

  태어나 표식을 지니고 죽지 않고 살아야만 되는 ... ... .

 

  태어나는 행복에 대한 보답을 하고 사는지, 어머니가 품에 안아 키우고 먹인 것에 대한 보답은 하는지?

  아버지가 몸이 닳도록 벌어온 돈에 대한 보답은 하는지, 애미 없는 자식이라 할머니가 보듬어 준 보답은

  하는지,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은 하는지, 친구의 괴롭힘에 대한 용서는 할 수 있는지,

  어떤 이의 다정한 미소에 기분 좋아진 것을 다른 이에게 배풀어 왔는지,  너무나 너무나 많다.

  끝으로 이런 것을 자식에게 철없이 강요를 하는 것은 아닌지, .............................................. .

 

  이런 것들을 알고 열심히 내몸은 내것이 아니니, 착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신나게 살면 되는 것이다.


  또, 웃으면서 즐겁게 즐기면서 살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열심히 신나게 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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